▴시문학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는 강북문인협회 해남(海南) 박정희(朴貞姬) 회장.
▴시문학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는 강북문인협회 해남(海南) 박정희(朴貞姬) 회장.

늦가을의 정취가 깊어진 우이동. 북한산 자락을 붉게 물들인 단풍잎 사이로 주민들의 발걸음이 오가는 솔밭근린공원에 지난달 18일, 아름다운 시어(詩語)들이 나붙었다. (사)강북문인협회(이하 강북문협)가 주최한 ‘가을 시화전’풍경이다. 2023년 4월, 전임 회장의 뒤를 이어 강북문협의 새로운 수장으로 만장일치 추대된 ‘해남(海南) 박정희’ 회장. 그녀가 취임한 이래 강북구의 문학 시계는 더욱 활발하고 따뜻하게 흐르고 있다.

‘박정희’라는 이름 앞에 ‘해남’이라는 고향의 이름을 굳건히 붙여 쓰는 시인. 1999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제10회 자유문학상과 제18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견고히 구축해 온 중견 문인. 그리고 이제는 강북구 문인 300여 명의 화합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리더가 된 그녀.

“문학은 내가 사는 집”이라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시(詩)란 무엇이며, 강북구라는 터전은 어떤 의미일까. 평소 ‘문학은 내가 사는 집’이라는 그녀의 대표 시 구절을 길잡이 삼아, 해남 박정희 회장의 문학적 삶과 강북문협의 청사진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름 ‘해남(海南)’, 땅끝에서 길어 올린 문학의 뿌리

인터뷰의 시작은 그녀의 이름, ‘해남’에 대한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묵직한 이름 중 하나인 ‘박정희’와, 땅끝마을로 상징되는 ‘해남’의 조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많은 분이 물어보십니다. 왜 굳이 고향을 이름 앞에 붙이느냐고요.” 박정희(朴貞姬) 시인은 부드러운 미소로 입을 열었다.“제 본명은 박정희, 한자로는 ‘곧을 정(貞)’에 ‘아름다울 희(姬)’를 씁니다. 물론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남’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저의 ‘근원’입니다.”

1960년, 그녀가 태어난 전라남도 해남은 한국 문학의 거목인 고정희, 김남주 시인을 배출한 ‘시문학의 고장’이다. 그녀에게 해남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문학적 자양분을 공급한 원천인 셈이다.

“시인에게 고향은 숙명과도 같습니다. 제 시의 정서, 제가 그리는 ‘그리운 소낙비’(첫 시집 제목)의 풍경은 모두 그곳에서 비롯되었죠. 하지만 ‘해남’을 붙이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시인 박정희’로서 오롯이 서기 위한 저만의 다짐입니다. 동명이인의 그림자가 아니라, ‘해남에서 온 박정희’라는 고유한 존재로서 시를 쓰겠다는 선언입니다. 땅끝(海南)은 모든 것의 끝이자, 바다(海)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이니까요. 제 문학은 그 경계에서 출발합니다.”

■문학은 내가 사는 집 그리고 시집 『섬속의 섬 한 권 엮었다』

해남 박정희 시인은 2010년 첫 시집 『『그리운, 소낙비』를 펴낸 후, 11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2021년 5월 두 번째 시집 『섬속의 섬 한 권 엮었다』를 상재했다. 이 시집의 서두를 여는 시 ‘문학은 내가 사는 집이다’는 그녀의 문학관(文學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11년 만의 시집이었습니다. 첫 시집이 젊은 날의 서정을 쏟아내는 ‘소낙비’ 같았다면, 두 번째 시집은 그 11년의 세월을 견디고 숙성시킨 ‘섬’을 엮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문학’은 현실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딛고 선 ‘삶의 집’이다. 꽃이 없고 반찬이 없어도, 시라는 집 안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간장 종지가 놓여있다는 시인의 고백은, 문학이 곧 일상이며 일상이 곧 문학이 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왜 ‘섬속의 섬’이냐고도 많이들 물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섬’으로 살아갑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죠. 하지만 그 섬 안에서 저만의 또 다른 섬, 즉 문학이라는 견고한 세계를 엮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11년은 시를 쓰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제 안의 섬을 더욱 단단하게 엮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의 몸짓이 저의 빈방을 흔들 때마다, 저는 ‘오방색 노끈’으로 저를 동여매며 그 ‘실꾸리’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문학은 저를 지켜주는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집입니다.”

■행복하고 화목한 강북문협, 300여 문인의 집을 짓다

시인으로서 자신만의 견고한 ‘집’을 지어 온 해남 박정희 시인. 그녀는 2023년 4월 27일, 강북문협 회장이라는 더 큰 ‘집’을 짓는 책무를 맡게 되었다. 오랜 기간 수석부회장으로 협회 발전에 헌신해 온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전 노동부 장관김호진 전임 회장의 뒤를 이어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정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특히 전임 김호진 회장님께서는 노동부 장관과 고려대 명예교수를 역임하신 저명한 분으로서, 지난 4년간 강북문협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뒤를 잇는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지만, 저를 믿고 응원해주신 회원님들의 귀한 뜻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당선 인사에서 “모두가 행복하고 화목한 강북문협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가 꿈꾸는 강북문협은 어떤 모습일까.

“문인들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섬’입니다. 각자의 집에서 홀로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지요. 그렇기에 문인협회라는 또 다른 집은, 그들이 언제든 찾아와 기댈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문학을 격려하고, 창작의 열의를 북돋우며,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화목한 집’, 그것이 제가 그리는 강북문협의 모습입니다.”

그녀의 이런 ‘화목한 리더십’은 협회 운영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그녀는 문학 강연과 시화전 등을 꾸준히 개최하며 회원들의 화합과 문학적 성장을 동시에 도모하고 있다.

■김수영문학관과 솔밭공원, 강북의 터전에 문학을 심다

해남 박정희 회장은 ‘화목한 집’이라는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문학을 강북구라는 ‘터전’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외연 확장에도 힘쓰고 있다. 그것은 강북구가 가진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강북구는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문학적 자산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김수영 시인은 한국 현대시사에 ‘자유’의 정신을 심은 분이죠.”

그녀는 2024년 4월, 도봉구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인 ‘김수영문학관’에서 (사)한국문인협회 김호운 이사장을 초청하여 문학강연을 개최했다. 이는 지역 문인들에게 중앙 문단의 수준 높은 담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김수영문학관을 강북 문학의 구심점으로 활성화하려는 포석이었다.

“문학은 박물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민들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죠.”

이러한 철학은 ‘솔밭근린공원 가을 시화전’으로 이어진다. 2024년 10월, 그리고 2025년 10월, 강북문협은 우이동 솔밭근린공원 정자 둘레에서 회원들의 시를 전시했다.

“솔밭공원은 매일 수많은 강북구민이 산책하고 쉬어가는 ‘삶의 광장’입니다. 그곳에 우리 회원님들의 시를 걸어두는 것은, 문학이 ‘집’에서 나와 ‘광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산책 나온 어르신들, 유모차를 끈 젊은 부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 한 편을 읽으며 위로를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아닐까요? 강북문협은 앞으로도 김수영문학관의 ‘문학적 깊이’와 솔밭공원의 ‘시민적 넓이’를 모두 아우르며 활동할 것입니다.”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시는 내 마음의 노래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녀에게 강북구민들과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시 ‘문학은 내가 사는 집이다’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제 시에 ‘시(詩)는 내 마음의 노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듯, 시를 쓰는 데도 특별한 자격은 필요 없습니다. 삶의 이야기가 있고, 푸르름 앞에서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함이 있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그녀는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한국 시단의 발전에도 기여해왔다. 그런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기교’가 아닌 ‘진심’이었다.

“오늘도 저는 ‘한 모금의 시를 받아 마십니다’. 시는 저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강북구민 여러분께서도 각자의 ‘집’에서 자신만의 ‘노래’를 불러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외롭고 고단하게 느껴질 때, 언제든 강북문인협회라는 이 ‘큰 집’의 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는 ‘문학의 이웃’이 되어드릴 것입니다.

”문학은 내가 사는 집’이라 말하는 시인. 그리고 이제는 300여 명의 문인들과 함께 ‘강북’이라는 든든한 터전 위에 더 크고 화목한 문학의 집을 짓고 있는 해남 박정희 회장. 그녀가 엮어낼 ‘강북문학’이라는 또 하나의 견고한 ‘섬’이,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 이슬을 담는 은쟁반’이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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