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실체를 밝힌다!

         ▲황천우 작가
         ▲황천우 작가

 

조선 조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우리 역사에서 상당히 과대포장되어 있다.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보위에 오른 그를 실질적인 조선의 개국자로 칭하며 흡사 영웅호걸 정도로 간주하지만 실재는 전혀 다르다.

먼저 권력 장악 과정이다. 정도전 일파에 의해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시점에 이방원은 무방비 상태, 속된 표현으로 개털이었다.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군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정도전의 주장을 이성계가 고스란히 받아들인 탓이었다.

평소 나대기 좋아했던 이방원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방원에게는 원경왕후가 있었다. 고려의 대표적 권문세족 출신인 원경왕후는 친인척으로부터 사전에 정도전의 계략을 인지하고 자신의 동생들과 함께 확실하게 대비책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기로 한 그날 원경왕후와 그녀의 동생들이 주축이 된 군사들이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정도전, 남은 등 그 일파를 제거한다. 이어 방원의 이복동생이었던 왕세자 방석과 방번 역시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런데 아내와 처가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방원은 본인의 인간성을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던 자신의 아내를 ‘음참하고 교활한 여자’라고, ‘잔악무도하고 교활한 여자’라 칭한다. 뒤이어 천민 출신들의 여자들을 후궁으로 들이기 시작해서 신하들이 데리고 놀던 창기 등 조선의 왕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들인다.

또한 자신을 보위에 앉힌 처남들을 죽이고 왕권강화라는 구실로 왕권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신의 사돈 즉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과 숙부를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 주륙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년(1418, 이방원이 보위를 세종에게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시기) 12월 23일 기록 인용한다.

『처음에 의금부에서 심온에게 묻기를,

“……한 것은 마땅히 상왕을 어떤 처지에 두려고 하였던 것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와 같이 억지로 묻는 것은, 나로써 상왕에게 무례한 짓을 행하리라고 치는 것이로구나.”

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낭관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심온이 상왕에게 무례한 짓을 행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왕이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주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약을 내리고자 하였더니,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반드시 아니할 수는 없겠다.”』

상기 기록에서 “이와 같이 억지로 묻는 것은, 나로써 상왕에게 무례한 짓을 행하리라고 치는 것이로구나.”의 원문을 살피면 "若如此强問, 當以我行無禮於上王。"으로 나타난다.

말인즉 “이처럼 강제로 묻는 일은 나로 하여금 상왕에게 무례를 행하라는 것과 진배 없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 일을 “심온이 상왕에게 무례한 짓을 행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로 변질되고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방원은 가차없이 심온을 죽인다. 한마디로 코미디다.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한 시점부터 180도 변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방원이 지니고 있는 자격지심의 결과였다. 변방 무인 가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고 원나라와 고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삶이 그의 내면에 굳게 자리했던 탓이었다.

이방원의 행적을 살피면 현대판 소시오패스 그 자체다. 그런데 그의 최후가 순탄했을까. 정치판 출신인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방원이 최후를 맞이한 시점에는 권력과 복수라는 두 개의 주요 이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방원과 세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권력 그리고 소헌왕후의 복수 말이다. 그리고 한창 혈기왕성하게 세종과 함께 사냥터를 전전하던 그가 최후를 맞이한다. 소헌왕후가 30대 중반의 과부로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두 여인을 이방원의 후궁으로 들인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 일 이후 이방원은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500여 년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지닐까. 대학 시절 국사를 전공했던 집사람이 한마디 한다. “조선은 고려보다 못하다”고 즉 “역사를 퇴보시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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