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학은 패거리의 영역이 아니다! 

             ▲황천우 작가
             ▲황천우 작가

 

정치판을 벗어나 막 소설가로 변신을 시도하던 무렵의 일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의아한 생각이 일어나 아이가 읽고 있는 글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들어온 몇 구절의 글을 읽자 어디선가 한번쯤은 보았음직한 느낌이 일어났다. 그러기를 한순간 망치로 뒤통수 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아이가 읽고 있는 글은 바로 ‘이상’의 작품 ‘날개’였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아이로부터 책을 빼앗다시피하여 표지를 살펴보았다. 큼지막하게 쓰인 ‘초등학생 권장 도서’란 글귀가 시선에 들어왔다. 마음을 추스르고 책 뒤에 실려 있는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이상의 날개가 초등학생들의 권장 작품으로 선정되었는지를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전화를 받는 상대방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곧바로 조처 취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날개’란 작품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역 근처 양동에 있던 창녀촌에 기생하고 있는 젊은이의 일상을 다룬 이야기로 초등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부담스러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를 초등학생 권장 도서로 당당하게 내세운 그 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필자는 정치판에 만연한 패거리 문화가 싫어서 그곳을 떠나 소설가로 변신했다. 그런데 막상 문학판에 들어서자 정치판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차라리 정치판에 그냥 머물러 있을 걸 하는 아쉬움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말도 되지 않는 등단 제도를 포함하여 필자가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문학상, 심지어 문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등단 장사를 하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잡지사들을 살피면 아찔하기까지 했다.

실례로 등단의 등용문이라는 신춘문예의 실상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지난 시절 영문학(서울시립대 영문학과)을 전공했던 필자가 40대에 들어 다시 대학에 입학해 문예창작(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을 공부하던 당시의 일이다.

그 무렵 모 언론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살피며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필자의 문학에 대한 지식과 인생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당선자의 입장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무슨 의미인지조차도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난해했다. 그를 살피자 오기가 발동되었다. 어떤 경우인지 살펴보자고.

그를 위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작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의 작품 중에서 당선작의 내용과 흡사하고 사용된 단어가 상당히 중첩되는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일인의 작품이라 단정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괘씸한 생각이 일어나 언론사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고등학교 동창을 찾았다. 물론 기사화해서 바로잡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그 친구로부터 기막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 경우가, 심사위원의 작품으로 당선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필자가 생각하는 문학은 자신과의 싸움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 과정에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고정 관념 특히 추악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여하한 경우라도 사고에 한계를 지녀서는 안 된다.

그런데 패거리에 속하다 보면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천만에다. 패거리의 전제조건은 추악한 욕심으로, 그 틀에 갇히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TV를 시청하다 우연히 ‘장은정의 도장깨기’란 프로를 시청했던 일이 떠오른다. 장은정이 가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내용인데, 혹시 문학도 그렇게, 앵무새를 양산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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