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글장난이 아니다!

         ▲황천우 작가
         ▲황천우 작가

 

정치권의 치졸한 변명 중 단골로 등장하는 구절이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한마디로 허구, 거짓이라는 의미다. 왜 이런 비유가 가능할까. 소설에 대한 사전적 개념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과연 허구에 지나지 않을까. 한마디로 천만에다. 소설의 바탕을 오해한 데에 따른다. 소설은 상상력도 한몫하지만 본질적으로 작가 개인이 직간접적으로 취득한 경험에 기반한다.

상상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면 상기처럼 허구로 흐를 확률이 농후하다. 그러나 상상의 범주는 작가의 경험 즉 실체적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작가의 내공이 깊다면 그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찾아가는, 가려진 이면을 파헤치는 과정이라 표현함이 적절하다.

아울러 영어로 소설을 의미하는 Novel은 중세 시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노벨라(Novella)에서 온 단어로 ‘새로운 이야기’, ‘신기한 이야기’란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허구가 아닌 새로운 사실 즉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풀이함이 옳다.

그런데 왜 소설은 허구라 생각할까. 그 시작을 헤아려보자. 19세기 일본의 한 작가가 Novel을 소설(小說)로 번역했고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참으로 한심한 대목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어떨지 모르나 우리나 중국 문학에서 소설(小說)은 잡설 혹은 잡문으로 통용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에 대한 용어가 없었을까. 역시 천만에다. 우리의 최초 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그 답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금오신화의 ‘신화’를 귀신 이야기 즉 神話로 알고 있으나 그 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의미하는 신화(新話)임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결과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그저 글장난으로 여기고 있다. 어느 정도인지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5.18 광주사태를 소재로 쓴 작품 ‘소년이 온다’ 중에서 일부 인용하자.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 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말로 교묘하게 글 장난한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삼십 센티 나무 자라니, 차라리 대검이라 표현하는 게 적절할 뻔했고 어떻게 개머리판으로 살을 찢을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당시 가장 빈번했던 유언비어 중 하나가 ‘계엄군이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냈다’는 대목이었다. 대검으로는 무를 썰기도 힘들다는 사실, 대검은 찌르는 용도지 베는 용도가 아님을 알지 못하고 유언비어를 퍼트렸는데 이는 그를 능가할 정도다.

그리고 당시 등장하는 소총은 M16, M1 그리고 카빈으로 단순히 소총을 언급하면 카빈 즉 ‘카빈 소총’을 의미했는데 무슨 말인지 난해하다. 당시 계엄군이 소유했던 M16은 ‘엠 십육’ 혹은 ‘엠 식스틴’이라 표현했지 굳이 소총이란 단어를 덧붙이지 않았다.

이는 영어로 번역할 때도 문제를 도출시킨다. ‘나무 자’와 ‘개머리판’은 절대 주어로 등장할 수 없고 그저 수단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어는 ‘당신’ 혹은 ‘계엄군’이 되어야 할 터인데 상당히 모호하다.

또한 비록 소설이지만 이러한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위상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외국인들의 시선에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더 잔인한 인권유린 국가로 인식될 터였다.

비단 한강을 예로 들었지만 소설을 접하는 다수가 소설을 소설(小說)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소설은 신화(新話)라 굳게 믿고 있고 아울러 소설은 글 장난이 되어서는 안된다 강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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