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뉴스] - 칼럼 -
황희 정승은 1363년 개풍군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재상직에 오르고 호는 방촌이다. 조선 역사상,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18년간이나 최장수 관직 생활을 하였다.
1385년 22세 때 진사로 급제하여 정치입문 후 인성 친화력의 도를 닦았다. 그의 훤칠한 인물에 눈이 매서워 함부로 접견을 못하였고, 이성계의 회군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져 고려가 멸망할 때 절의파 70여 명의 식자들과 두문동에 은거 중이었으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부름을 재차 받고서 관직 생활의 반열에 올라 성균관 학관(관장)이 되었다.
종묘배양 공신청백리에 오른 인물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과 사위가 뇌물수수, 부패 등으로 한 때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래도 세종이 황희를 신임하고 관직을 박탈 안 한 이유는 명문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총명하였고, 큰 키에 눈이 호랑이 눈처럼 기가 살아있어 누구든지 함부로 시비를 못하였고, 민첩하기가 뛰어난데다 한번 보고들은 일은 모두 알 수 있는 기억력으로 인해 공신감들이었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의 “비밀은 없다”란 유익한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어느 들판을 지나다가 두 마리 소로 논을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황희가 농부에 말을 걸었다. “두 마리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잘하오?” 농부는 일하다 말고 논에서 나와 귓속말로 대답했다. “누런 소가 검정소보다 일을 잘하오” 황희는 “뭐 그런 걸 가지고 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일하다 말고 나와서 말할 게 무어냐”라고 했다.
농부가 말하기를 “모르시는 말씀이오. 말못하는 짐승일망정, 자기를 무시하고 흉보고 욕한다면 기분이 상해서 일을 제대로 안 합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농부의 말을 듣고 황희는 크게 깨달았다. “흉보면 안 되고, 비밀은 없다.” 큰 교훈을 가슴에 묻었고, 평생을 지키며 살았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황희는 아랫사람 앞에서 흉보고 야단치는 일은 평생 아니했다. 농부와 황희 정승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나?” 생각해 볼 일이다. 고려초기 김수장이라는 시조의 문객은 “해동가요”를 편찬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 하는 말은 하늘이 듣고, 암실에서 하는 말은 귀신이 듣는다” 하였다. 황희는 농부의 말을 인용하여 왕과 중신 간에 마찰을 중화시켜 흉보는 일이 없도록 세종을 보필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결점은 때론 수면 위로 나타나 물의를 일으키고 때론 수면 밑에 있다가 언젠가는 물 위로 올라 밝혀지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이치요 우리 모두 느껴 “비밀은 없다”라는 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사의 역사를 보면 권력에 아부하여 잇속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른 소리 쓴소리로 권력에 대들다 배신자로 몰린다. 지구는 돈다. 이에 따라 사계절이 생기고 꽃은 피고 진다.
황희 정승은 권좌에 오랫동안 있었다. 87세 나이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2년 후 1451년 만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금승리에 묘가 있으며 1996년 경기도 기념물 34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황희 정승 일대기에서 올바른 인생관 즉, 남을 칭찬은 못해도 흉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언어예절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2025.8.15
박윤규 김포문화원장, 김포충효문화인성원 고문